29
조혜은 / 장마―휴일

밤이 깊으면 비어 있는 벤치가 없어. 나와 너는 걷고 또 걸었지. 밤이 깊어도 쉴 수가 없어. 너는 나에게 헐벗은 꿈을 맡긴 채, 어느 먼 곳에서. 나는 나에게 아이의 헐벗은 숨을 맡긴 채, 또 어느 먼 곳에서. 휴일이 없는 나라에서 우리는 언제 일하고 어떻게 쉴까.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오래된 양주 가게와 빛바랜 양장점을 지나 어느 낯설고도 낯익은 가난한 골목들을 손에 걸고 걷고 또 걸었었는데, 이제 이 모든 건 오래된 휴일처럼.

 

좋아하는 마음을 한 가닥도 숨기지 못하던 너는, 이제 내게 몸이 담긴 사진을 보내달라고 말하지. 너는 그곳에서 뭇 사내들이 낯익고도 낯선 여자들의 몸을 더듬어 파괴하는 것을 지켜본다고. 너는 사라진 휴일처럼 두렵고 상처 난 영혼을 더듬으며. 하루는 나와 아이의 이름을 손바닥에 소중하게 적었다고 말했지. 나는 모든 소멸하는 것들의 눈 속에 내 이름을 적어 넣었지. 

 

우리의 몸속에는 매일 같이 노란 눈이 노란 독이 쌓이고 하루하루가 매일의 호흡같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가녀린 죄책감을 나누고, 서로의 병들어가는 몸에 욕설을 퍼붓고, 괜찮아 우리는. 우리와 상관없이 시간은 흘러. 낮고 어두운 그늘에 마음을 숨기며. 이 장마는 언제 끝이 날까. 우리는 왜 죄를 짓기도 전에 용서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하는 걸까.

 

우리는 약속도 하기 전에 지키는 법을 먼저 배우며 시간을 접어 기다림을 끌어왔고, 나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고. 사랑해. 그것만은 나의 잘못이었지. 너는 휴일이 없다는 것을 믿어 달라 말했지. 미안해. 실패를 고백하는 우리에게선 존재하지 않았던 첫사랑의 냄새가 났고. 저 가파른 골목은 이제 누구의 낭떠러지인 걸까? 먼 곳에 있으면 멀어지는 것들을 바라보기 쉬웠지. 실은 네게 아무것도 미안하지 않아. 긴 장마는 이제 끝났어. 휴일이 있지만 쉴 수 없는 나라에서, 만날 수 없이 흩어진 우리는.

 

 

 

 

 

 

 

 

 

'phrase > all'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석정 / 꽃덤불  (0) 2020.12.07
구현우 / 드라이플라워  (0) 2020.01.05
허연 / 무념무상 2  (0) 2019.12.22
허연 / 칠월  (0) 2019.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