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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정 / 꽃덤불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 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늬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 보리라
구현우 / 드라이플라워
백야 속에서 네가 반쯤 웃고 있었다 매혹적인 이미지 외설적인 향기 몽환적인 목소리 너의 모든 것을 훔치고 싶은 한순간이 있었다 아주 잠깐 너를 꽉 안아주었다 그것은 치사량의 사랑이었다 나는 네가 아름다운 채 살아 있길 바란 적은 없었으나 아름다웠던 채 죽기를 바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조혜은 / 장마―휴일
밤이 깊으면 비어 있는 벤치가 없어. 나와 너는 걷고 또 걸었지. 밤이 깊어도 쉴 수가 없어. 너는 나에게 헐벗은 꿈을 맡긴 채, 어느 먼 곳에서. 나는 나에게 아이의 헐벗은 숨을 맡긴 채, 또 어느 먼 곳에서. 휴일이 없는 나라에서 우리는 언제 일하고 어떻게 쉴까.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오래된 양주 가게와 빛바랜 양장점을 지나 어느 낯설고도 낯익은 가난한 골목들을 손에 걸고 걷고 또 걸었었는데, 이제 이 모든 건 오래된 휴일처럼. 좋아하는 마음을 한 가닥도 숨기지 못하던 너는, 이제 내게 몸이 담긴 사진을 보내달라고 말하지. 너는 그곳에서 뭇 사내들이 낯익고도 낯선 여자들의 몸을 더듬어 파괴하는 것을 지켜본다고. 너는 사라진 휴일처럼 두렵고 상처 난 영혼을 더듬으며. 하루는 나와 아이의 이름을 손바닥에..
허연 / 무념무상 2
잔해를 남긴 것에 대해 후회한다. 녹물 흘러내리고 있는 오래된 도시의 교각 밑을 걸으며, 버려진 채 주저앉은 폐차 옆을 지나며 저것들도 누군가의 후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제비집을 허물고 아버지에게 쫓겨나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었다. 감당할 수 없이 두렵고 외로웠으며, 바닥에 내팽겨쳐진 빨간 제비 새끼들의 절규가 마른 봄을 관통하던 그런 밤이었다. 그날 나는 신부(神父)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때 처음 '뼈아프다'는 말을 이해했고, 철든 시절까지 난 괴로웠다. 절대로 묻히거나 잊히지 않는 일은 존재했다. 알면서도 다 알면서도 잔해를 남겼다. 후회한다. 돌아가고 싶다. 내가 짓고 내가 허물었던 것들에게.
헤르만 헤세 / 눈 속의 나그네
내가 생각던 것보다도 죽음은 상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