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191001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허수경

 

평점 ★★★

취향도 ♡♡♡

 

 

 

책 정보

 

"저 오래된 시간을 무엇이라 부를까"
그 모든 시간의 '사이'를 둘러싼 상상력과 질문들


우리말의 유장한 리듬에 대한 탁월한 감각, 시간의 지층을 탐사하는 고고학적 상상력, 물기 어린 마음이 빚은 비옥한 여성성의 언어로 우리 내면 깊숙한 곳의 허기와 슬픔을 노래해온 시인 허수경이 여섯번째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출간했다. 2011년에 나온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이후 5년 만의 시집이다. 물론 보다 아득한 세월이 시인과 함께한다. 1987년에 등단했으니 어느덧 시력 30년을 바라보게 되었고, 1992년에 독일로 건너가 여전히 그곳에 거주하고 있으니 햇수로 25년째 이국의 삶 속에서 모국어로 시를 쓰고 있는 셈이다.


아주 오래전, "내가 무엇을 하든 결국은 시로 가기 위한 길일 거야. 그럴 거야."(『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2001)라고 했던 그의 말을 새삼스레 떠올려보게도 되는, 산문도 소설도 아닌 다시 시집으로 만나는, 마디마디 가뭇없이 사라지기 전 가슴 깊이 파고들어 먹먹하기만 한 시 62편이 이번 시집에 담겼다.

 

출처 | 예스24

 

 

 

당신의 어깨가 나에게 기대오는 밤이면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세상을 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 온 여름에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수줍어서 그 어깨를 안아준 적이 없었다
후회한다

「레몬」 p32~35

 

왜 이 책을 샀느냐, 라고 묻는다면 위의 시 때문에 샀다고 답할 것이다. 위 구절을 가장 많이 봤다. 그러나 실제로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부분은 저 부분이 아니었다.

 

달이 뜬 당신의 눈 속을 걸어가고 싶을 때마다 검은 눈을 가진 올빼미들이 레몬을 물고 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밤 속에서 사랑을 한다 당신 보고 싶다. 라는 아주 짤막한 생애의 편지만을 자연에게 띄우고 싶던 여름이었다

「레몬」 p32~35

 

 

 


 

 

 

내가 그대 영혼 쪽으로 가는 기차를 그토록 타고 싶어 했던 것만은 울적하다오

「호두」 p.44~45

 

'영혼 쪽으로 가는 기차'라는 표현이 눈에 밟힌다.

 

 

 

내 손을 잡아줄래요?
피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그냥 아무 말 없이 잡아주시면 됩니다



내 손을 잡아줄래요?
피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내가 왜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그 막연함도 들어볼래요?



다만 손을 잡아달라는 간절한 몸의 부탁일 뿐입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내 기억을 가진 쥐가 당신에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내 손을 잡아줄래요?

「내 손을 잡아줄래요?」 p.66~68

 

 

 

간호사는 천진하게 말했지
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죽은 사람보다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붙들고 있었던 손들이 더 많대요 뼈만 남은 손을 감싸며 흐느끼던 손요

「빙하기의 역」 p111~113

 

 

 

억겹의 바이러스는 북극해를 헤엄쳐 당신의 바다로 간다

「겨울 병원」 p122~124

 

왜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문장을 두고 넘어가려고 해도 자꾸만 눈길이 갔다.

 

 

 

 

 

'book > poem'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1203 영원한 귓속말  (0) 2019.12.03
191126 다정한 호칭  (0) 2019.11.26
191002 아네모네  (0) 2019.10.06
190926 오십 미터  (0) 2019.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