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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 이미
이미 젖은 신발은 다시 젖지 않는다
안현미 / 불안의 뒤란
가끔 내가 쓰는 모든 시들이 유서 같다가 그것들이 모두 연서임을 깨닫는 새벽이 도착한다.
허연 / 칠월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 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 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Doctor Who 912 Hell Bent
Me(Ashildr): You know why we run, Doctor? The Doctor: Because it's fun. Me(Ashildr): Because we know summer can't last forever.
성동혁 / 여름 정원
누가 내 꿈을 훼손했는지 하얀 붕대를 풀며 날아가는 새 떼, 물을 마실 때마다 새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림자의 명치를 밟고 함께 주저앉는 일 함께 멸망하고픈 것들 그녀가 나무를 심으러 나갔다 나무가 되어 있다 가지 굵은 바람이 후드득 머리카락에 숨어 있던 아이들을 흔든다 푸르게 떨어지는 아이들 정적이 무성한 여름 정원, 머무른다고 착각할 법한 지름, 계절들이 간략해진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정원에 있다 슬프고 기쁜 걸 청각이 결정하는 일이라니 차라리 눈을 감고도 슬플 수 있는 이유다 정원에 고이 잠든 꿈을 누가 훼손했는지 알 수 없다 눈이 마주친 가을이 담을 넘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고 걸쳐있다 구름이 굵어지는 소리 당신이 땅을 훑고 가는 소리 우리는 간헐적으로 살아 있는 것 같다